글
성미정과 김행숙, 혹은 성인 동화
Junkbox
2010. 4. 4. 04:36
꽃씨를 사러 종묘상에 갔다 종묘상의 오래된 주인은 꽃씨를 주며 속삭였다
이건 매우 아름답고 향기로운 꽃입니다 꽃씨를 심기 위해서는 육체 속에
햇빛이 잘 드는 창문을 내는 일이 가장 중요합니다 너의 육체에 창문을
내기 위해 너의 육체를 살펴보았다 육체의 손상이 적으면서 창문을 내기
쉬운 곳은 찾기 힘들었다 창문을 내기 위해서는 약간의 손상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나는 밤이 새도록 너의 온몸을 샅샅이 헤맸다 그 다음날에는 너의
모든 구멍을 살펴보았다 창문이 되기에는 너무 그늘진 구멍을 읽고 난 후
나는 꽃씨 심는 것을 보류하기로 했다 그리곤 종묘상의 오래된 주인에게
찾아가 이 매우 아름답고도 향기로운 꽃을 피울 만한 창문을 내지 못했음을
고백했다 새로운 꽃씨를 부탁했다 종묘상의 오래된 주인은 상점 안의 모든
씨앗을 둘러본 후 내게 줄 것은 이제 없다고 했다 그 밤 나는 아무것도 줄 수
없으므로 행복한 나를 너의 육체 모든 구멍 속에 심었다 얼마 후 나는 너를
데리고 종묘상의 오래된 주인을 찾아갔다 종묘상의 오래된 주인은 내가 키운
육체의 깊고 어두운 창문에 대해서 몹시 감탄하는 눈치였다 창문과 종묘상의
모든 씨앗을 교환하자고 했다 나는 창문과 종묘상의 모래된 주인을 교환하기를
원했다 거래가 이루어진 뒤 종묘상의 오래된 주인은 내 육체 속에 심어졌다
도망칠 수 없는 어린 씨앗이 되었다
성미정 <심는다>
야구장을 소유한 사람을 나는 선생님이라 부른다 그 선샌님은 내게 영어를
가르치지 않았다 수학도 가르치지 않았다 물론 야구도 가르친 바 없다 야구란
게 배워서 되는 것도 아니지만 말이다 처음엔 선샌님이라 부르는 게 어색했다
다른 선수들이 모두 선생님이라 부르는 게 어색했다 다른 선수들이 모두 선생님이라
부르니까 튀기 싫어서 그렇게 불렀다 야구장을 소유한 선생님들 주변에는 제자들로
가득하다 야구장에 들어가고 싶어서 제자가 된 것이다 야구장이 없었다면 선생님들도
제자에 불과했을 것이다 제자들은 야구는 열심히 하지 않고 선생님만 따라다닌다
선생님이 하는 말은 틀려도 예 맞아도 예 언제나 맞다고만 한다 내가 아는 진정한
야구 스승들은 야구장을 소유한 적이 없다 그래서 그분들은 제자가 없다 그분들은
누굴 가르치는 게 야구에선 불가능하다는 걸 일찍이 깨달았다 끊임없이 스스로
배웠을 뿐이다 그러나 오늘 나는 선생님들을 마음속 깊이 우러나와 선생님이라
부른다 수많은 제자에 겹겹이 둘러싸여 한치 앞을 보지 못하는 선생님들 그런
선생님들은 내게 몸소 가르친다 절대로 선생님처럼 되면 안된다고 그러니 그분들은
진짜 야구 선생님이다
성미정 <야구선생님>
내 이름은 군대이니 바야흐로 이 시대에 우리가 많음이니이라 (마가복음 5:9)
"내 이름은 군대이니 우리가 많음이네. 그대와 내가 복수이니 우리네.
"너희는 코를 벌름거리며 행군하는 돼지들이 아닌가?
"불쌍한 모친이여, 나는 그대의 적이 아니네. 내 이름은 군대이니 내분은
어리석지만 역사가 깊네.
"뻔뻔하군. 욕실에 군대를 몰고 와서 목욕하는 여자에게, 불쌍한 여인이여,
입 맞추다니!
"내 이름은 군대이니 그대가 부른 용병이네. 땀 흘리는 그대여, 그대는
시나브로 팽창하고 있네.
"너희로 인해 지펴진 가랑이에 이상한 꽃이 피는군. 어지럽지만 나는 목욕하는
여자로서 비누칠을 한다네.
"그대로부터 나왔으니 그대에게 돌아갈 터, 욕탕은 예로부터 발견의
장소였네. 내 이름은 군대이니 미끄러운 그대여, 복종은 미덕이네.
"나는 샤워를 한 돼지란 말인가?
"그대는 그대에게 복종할지니 바야흐로 때는 그대의 아비가 적색의 신호를
두려워하여 대기하고 있는 때, 붉은 군대여
김행숙 <귀신 이야기 3>
오전 5시의 거리는 놀랍네 오전 5시의 빛은 푸르네
오전 5시에 나는 자전거를 타는 사람이 아니네
오전 5시의 거리를 나는 입김을 섞으며 다니는 사람이 아니네
오전 5시의 거리는 놀랍네 뛰어가던 남자가 종이 뭉치를 떨어뜨리고
밟고 간 사람은 없었네 흩어진 종이를 줍던 남자의 동작이 느려지네
아무도 쫗아오지 않았네
오전 5시에 남자가 우네 오전 5시의 빛은 푸르네
오전 5시에 거리의 가로등은 아직 꺼지지 않았네 오전 5시에
나는 신문을 보는 사람이 아니네
오전 5시에 나는 베란다에서 잠옷을 펄럭거리는 사람이 아니네
오전 5시의 거리에서 남자는 쭈그리고 앉아 우는 사람이 아니네 오전
5시의 거리는 놀랍네
오전 5시의 빛은 푸르네 오전 5시의 거리에 남자가 남긴 몇 장의 종이
중에서 아직 구겨진 것은 없네
김행숙 <오전 5시를 보다>